'한국적 록'의 유산(流産)과 유산(遺産): 1974-75 나의 포크이야기。
2008. 8. 3. 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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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록'의 유산(流産)과 유산(遺産): 1974-75 신현준 homey@orgio.net | contents planner |
1975년 10월, 엽전들과 검은 나비, '매머스 리싸이틀' 1975년 10월 18일부터 19일까지 퍼시픽 호텔의 '홀리데이 인 서울'에서 [신중현 잼 인 퍼시픽(Jam in Pacific)]이라는 이름으로 '리싸이틀'이 열렸다. [일간스포츠]가 주최한 이 공연은 1970년대의 정오(正午)에 열린 한국 그룹 사운드의 절정을 알리는 이벤트로였다. 김추자, 김정미, 장현 등 '신중현 사단'에 속하는 가수들이 출동했고 박상규, 정미조, 윤항기, 옥희 등 그의 사단에 속하지 않는 유명 가수들도 '우정 출연'(요즘 말로 게스트)했다. 공연은 3부로 구성되어 성황리에 이루어졌다.
공연이 열리기 전 검은 나비의 관악기 주자 손학래는 "체면보다는 같은 음악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신씨를 격려하는 아량을 보이겠다"([일간스포츠] 1975. 10. 17)고 말했고, 이 기사는 신중현과 손학래의 만남을 "2년만의 재회"라고 표현했다. 어디서 만났다가 헤어진 것일까. 최근 CD로 재발매된 음반의 주인공인 더 맨(The Men)이라는 그룹이다. CD 1장에 "아름다운 강산", "안개 속의 여인", "거짓말이야" 단 세 곡만이 들어 있어서 이 그룹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리둥절해 할 음반이다. 그리고 실제로 들어본 사람이라면 '경악'할 것이다. 10분이 넘는 연주시간 동안 기타는 물론 베이스, 드럼, 키보드, 오보에가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이건 음악을 직접 들어보기 바란다. 엽전들과 검은 나비는 더 맨이 갈라지면서 만들어진 그룹이다. 먼저 손학래(오보에), 김기표(더 맨에서 키보드였으나 검은 나비에서는 기타), 이태현(베이스), 문영배(드럼)는 히 식스 출신의 최헌을 보컬로 영입하여 5인조 그룹을 이루었고 검은 나비로 이름을 붙였다. '신중현 계보'와 '김홍탁 계보'가 뒤섞인 듯한 이 그룹은 뒤에 최헌이 보컬을 맡은 그룹들, 즉 호랑나비(1979년), 불나비(1982년)로 이어지는 이른바 '나비 계보'를 만들어 내었다. 또한 최헌, 김기표, 이태현은 영 사운드 출신의 안치행과 합류하여 '안타 프로덕션'을 만들었다. 아, 오해하지 말도록. 안타 프로덕션은 음악을 연주하는 그룹이 아니라 음악 비즈니스를 하는 곳이다. 안타는 최헌과 윤수일로 대표되는 1970년대 후반 '대마초 파동 이후의 슈퍼스타'를 길러낸 곳이다. '트로트 고고', '로꾸뽕'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만든 곳인데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
맨과 엽전들 사이에 일시적으로 뭉친 슈퍼 그룹. 왼쪽으로부터 이남이(베이스), 김기표(키보드, 기타), 문영배(드럼), 신중현(기타), 최이철(기타).
한편 더 맨의 멤버들을 떠나 보내고 홀로 남은 신중현은 영 에이스 출신의 이남이(베이스)와 히 식스 출신의 권용남(드럼)을 영입하여 '파워 트리오'를 만들었다. 이게 엽전들이다. 정확히 말하면 초기 엽전들에서는 덩키스와 안건마 악단에 있던 김호식이 드럼을 연주했다. 그 전에 신중현, 최이철(!), 이남이, 김기표, 문영배 등이 잠시 모여 있던 그룹도 있었다. 당시의 프로페셔널 그룹 사운드계에서 난다 긴다하는 사람은 다 모인 셈이다. 이건 '증명 사진'이 하나 있어서 한국 록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관련자들의 증언도 엇갈려서 뭐라고 확답을 못 하겠다. 어쨌든 이 그룹이 엽전들과 검은 나비를 각각 탄생시키고, 뒤에는 사랑과 평화까지 탄생시켰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엽전들과 검은 나비는 한국판 슈퍼 그룹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1969-71년의 시기가 (후기) 키 보이스와 히 화이브(뒤에는 히 식스)의 라이벌 관계가 형성된 시기이자 '생음악 살롱'의 시대였다면, 그리고 1971-73년의 시기가 신예 그룹 사운드들이 군웅할거하던 '고고 클럽'의 시대였다면, 1974년부터 1975년은 이전 시기의 흐름이 계속 이어지면서 슈퍼 그룹이 탄생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슈퍼 그룹도 일상적 활동공간은 여전히 나이트 클럽의 업소였다. 그렇지만 이 공연을 앞두고는 두 달 동안 연습만 하는 등 '영미의 록 스타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말하자면 한국에서도 그룹이 연주하는 록 음악이 '댄스 음악', '백그라운드 음악'을 넘어서 '감상'을 위한 대중음악으로 발돋움하려는 조짐이었다.
실제로 두 슈퍼 그룹은 '히트곡'을 만들어 냈다. 석유파동에 따른 경기침체 하에서도 많은 음반을 팔았다. 1975년 봄 일간지 기사에 따르면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이 차트의 1위를, 그리고 검은 나비의 "당신은 몰라"가 3위를 차지하고 있다(참고로 2위는 김정호의 "하얀 나비"였다). 따지고 보면 "미인"은 신중현이 '작곡가'로서가 아니라 '가수'로서 주류에서 성공을 거둔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사건이었다. 이 기사는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어니언스 등 음반계를 누비던 팝 계열 인기 가수가 신중현, 김정호, 검은 나비 등에게 인기의 좌(座)를 넘겨주고 뒷전에 물러앉은 인상이다"([일간스포츠], 1975. 4. 5.)라는 분석도 내어놓았다. 이 기사는 "미인"과 "당신은 몰라"를 김정호의 "하얀 나비"와 더불어 이른바 '3대 히트곡'으로 불렀다. 물론 이런 분석은 1975년 중반 이후 송창식의 "왜 불러", 윤형주의 "어제 내린 비" 그리고 이종용의 "너" 등이 불러일으킬 파란을 고려한다면 다소 섣부른 예측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한국 대중음악 차트의 공신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사 몇 개를 더 소개하겠다.
1975년 상반기를 결산하는 기사에는 "1975년 1월부터 6월까지 LP판매량 1만장을 넘긴 히트 가요 베스트 10은...(중략)... 신중현("미인"), 김정호("하얀 나비"), 김세환("사랑하는 마음"), 윤항기("이거야 정말"), 송창식("왜 불러"), 윤형주("어제 내린 비"), 검은 나비("당신은 몰라"), 이미자("정착지"), 박상규("조약돌"), 둘다섯(긴머리 소녀) 등. 그러나 "미인", "당신은 몰라" 등 2, 3곡을 빼면 기껏해야 1만장을 간신히 넘긴 히트였다"([일간스포츠], 1975. 7. 12)는 분석이 나온다. 이런 논조의 분석은 1975년 말에도 큰 변동이 없다. "연예 '75 부침의 안팎"([일간스포츠], 1975. 12. 21)이라는 기사를 보아도 "미인"과 "당신은 몰라"는 10위권 안에 들어 있다. 음반도매상에게 질문하여 물어본 결과 "미인"은 적어도 10만장, "당신은 몰라"는 적어도 5만 장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1975년 두 그룹의 당시의 위세가 어땠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1975년 10월 18-9일 열렸던 신중현 리싸이틀은 한국에서도 '국민적 록(national rock)' 혹은 '한국적 록'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는 조짐을 보여준 사건 아니었을까. 뭐랄까 미국의 이글스(The Eagles)나 영국의 퀸(Queen) 같은 '국민 밴드' 말이다.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면서도 매체와 평단의 존중을 받고, 국제적 감각과 더불어 국민적 정서를 가진 음악을 구사하는 록 음악의 탄생이 임박한 순간이었다. 대중들도 서서히 록 음악의 강력한 비트와 전기 사운드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두 음반 모두 한국 음반업계의 부동의 메이저인 '지구레코드'라는 레이블을 달고 나왔다. 물론 신중현과 엽전들의 음반은 전속계약을 맺고 제작한 것이고 검은 나비의 음반은 킹 프로덕션에서 대명제작한 것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메이저에서 록 음반을 제작·발매했다는 것은 록 음악이 이제 주류를 '돌파'하는 징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위 공연이 열린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은 12월 4일 신중현은 박광수, 권용남, 김추자 등과 함께 전격 구속되었고, 끝내 실형을 선고받았다. 죄목은 다름 아니라 '대마초 흡연'이었다. 몇 일 뒤 손학래와 검은 나비의 멤버들도 비슷한 일을 당했다. 물론 이들 '유명인'만 험한 일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1979년 말까지, 쉽게 말하면 박정희가 죽을 때까지 이들은 힘든 나날을 보냈다. 신중현은 최근 인터뷰에서 "지금도 자다가도 그 생각만 하면 벌떡 일어난다"고 말한 바 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박정희라는 사람이 집권하고 있던 시대였으니... 그런 점에서 위 기사에서 "검은 나비와의 협연이 볼 만(하다)"라는 타이틀이 "검은 나비와의 협연 불만"으로 나온 것은 불길한 징후였다. 단순한 오타였겠지만 '일이 잘 안 되려면 별 게 다 안 된다'는 말이 나오는 대목이다.
유신정권, 불온을 처단하고...
1974년부터 1975년에 이르는 시기는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 나아가 대중문화 전체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기다.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이 시기의 대중음악 작품과 작가가 뛰어나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또 한가지 의미가 있다. 다름 아니라 이 시기는 독재정권과 청년문화가 정면으로 충돌한 시기다. 사실 그건 '충돌'이라기보다는 멀쩡하게 있는 청년문화에 독재정권이 '시비'를 건 것에 가깝다. 말이 좋아서 '시비'이지 그건 물리적 금지라는 방법을 동원한 전면적인 것이었다.
요약하면 1974년부터 1975년의 약 2년 동안의 시기는 1974년 벽두에 발표된 긴급조치 1호로 시작되어서 1975년 12월에 대마초 연예인들의 대량 구속 사태(이른바 '대마초 파동')로 끝난다. 두 사건은 사실 큰 연관이 없어 보인다. 긴급조치 1호는 정치적 사건인 반면, 대마초 파동은 문화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다. 긴급조치가 '불온'을 단죄하려는 조치였던 반면, 대마초 파동은 '퇴폐'를 처단하는 조치였기 때문이다. 이건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슬슬 언급하기로 하고 일단 1974년 벽두를 장식한 긴급조치 1호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 1월 8일 오후 5시를 기해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하였다. 동아일보 1974. 1. 9.
1974년 새해 벽두는 '긴급조치 1호'와 함께 시작되었다. 정식 발표는 1월 8일이었지만, 해가 바뀌기 전인 1973년 12월 29일 [개헌(改憲) 서명(署名) 운동 중지 촉구 대통령 담화문]이 이미 발표되었다. "나는 최근 일부 지각없는 인사 중에 유신 체제를 뒤집어엎고 사회 혼란을 조성하려는 불순한 움직임이 있는 것을 알고..."로 시작하는 이 담화문의 내용이 지금도 귀에 윙윙거리는 사람이 꽤 있을 것이다. 박정희의 독특한 억양과 함께.... 정식 발표된 긴급조치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절의 행위를 금한다. (2)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절의 행위를 금한다. (3)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절의 행위를 금한다. (4) 전 (1), (2), (3)호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절의 언동을 금한다. 이 조치를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 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 (6) 이 조치를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하는 자는 비상 군법 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7) 이 조치는 1974년 1월 8일 17시부터 시행한다."
위에서는 생략했지만 담화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표현은 '경거망동(輕擧妄動)'이었다. 경거망동이라... 이는 일단은 유신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불온' 세력을 겨냥했다. 이는 단지 정치 세력을 겨냥한 것만은 아니었다. 문화예술인 중에서 시인(詩人) 김지하는 "1974년 1월을 죽음이라고 부르자"는 유명한 문장을 남겼다가 급기야 사형 언도까지 받아서 '죽다가 살아나는' 경험을 했다.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가 발표되면서 '민청학련' 관련활동을 엄단하는 조치가 선포된 직후에 발생한 일이다. 다른 많은 문화예술인들 가운데 김지하와 비슷한 운명을 맞이한 인물들도 꽤 있다.
그러면 대중음악인 중에서 '경거망동'을 한 인물은 누가 있을까? 가장 유명한 인물은 김민기일 것이다. 그는 이 무렵 가톨릭계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1973년 봄 김지하의 연극 [금관의 예수]에 참여한 데 이어 1974년 4월에는 이종구(현 한양대학교 음대 교수), 김영동(작곡가) 등과 함께 소리굿 [아구]에 참여하는 등 '불온'한 행동을 한 것이 분명하다. 김민기는 이미 1972년 봄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노래부르기를 지도했다가 동대문경찰서로 연행된 뒤부터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고 그의 음반은 이때부터 '품귀' 현상을 빚었다.
김민기 외에도 '불온'으로 간주된 대중음악인은 꽤 있다. 서유석 역시 1973년 경 TBC 라디오의 심야 프로그램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DJ를 맡아보다가 베트남전의 참상을 고발한 UPI 종군 기자가 쓴 책을 읽어 내리는 '경거망동'을 했다. 제작진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로부터 "그 자리에 꼼짝 말고 앉아 있으라"는 전화를 받았고, 프로듀서의 하얗게 질린 표정을 본 서유석은 20분짜리 곡 하나를 턴테이블에 걸어놓고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3년 동안 서울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전국 각지를 배회하면서 지내야 했다"는 말은 조금 과장으로 들리지만, 1974년부터 1976년 사이에 서유석이란 이름으로 발표된 음반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1977년에 "가는 세월"을 히트시켰지만 그때는 이미 맥빠진 상태였다.
이렇게 음악인의 '활동'을 묶어버리는 경우는 문화적 규제라기보다는 정치적 탄압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불온하다'고 간주되는 작품에 대한 문화적 규제도 만만치 않았다. 몇 가지 예만 들어보자. 군대를 다녀와서 1974년에 데뷔 음반 [이리저리](서라벌, SRB 791)를 발표한 이정선의 경우 "거리"라는 곡의 가사가 문제가 되어 음반의 판매와 방송이 금지되었다. "말을 하는 사람은 많아도 말을 듣는 사람은 없으니 아무도 듣지 않는 말들만이 거리를 덮었네"라는 가사 때문이었다. 그 뒤에 발표한 [섬소년](지구, JLS 120988)의 경우는 표지의 장발이 문제가 되어 다시 음반이 반려되었다. 결국 표지 사진을 바꾸는 등 우여곡절 끝에 이정선은 공식 데뷔 음반을 발표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리저리]는 '이정선 마이너스집', [섬소년]은 '이정선 0집'으로 불린다. 당시 검열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라서 현재 중고음반점에서 '희귀'에다가 '고가'이다. 검열이 중고음반의 가격만 올려놓은 셈이다.
이정선을 포함하여 한대수, 김의철, 양병집, 오세은 등 1974년에 음반을 발표한 인물들은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편의상 '포크'라고 분류하지만 막상 음악을 들어보면 포크도 아니고, 록도 아닌 독특한 작품세계를 선보인 인물들이다(이들 중 오세은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모두 '데뷔 음반'이었다). 이들이 발표한 음반은 대략 '금지곡 지정 이후 음반 전량 회수'라는 절차를 취하면서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금지를 지정한 사유가 무엇인지 지금 돌아보면 실소가 나온다. 이정선의 "거리"의 경우 '불신풍조 조장, 냉소적'이라는 딱지가, 오세은의 "고아"의 경우 '지나친 비정, 불신감 조장'이라는 딱지가, 양병집의 "서울 하늘"의 경우 '가사·창법 방송부적'이라는 딱지가, 김의철의 "섬아이"(노래는 박찬응)의 경우 '창법 미숙'이라는 딱지가 각각 붙었다. 이런 황당무계한 사유들이 반드시 '불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불온'에 대한 강박이 낳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 인물과 작품이 정말 불온한 것이었을까. 유신 정권에서 생각한 것처럼 불온한 것은 아니었다. 이른바 '빨갱이'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온건하고 순종적인 것도 물론 아니었다. '언더그라운드'는 반드시 정치적으로 저항적인 것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정권과 생리가 맞을 리도 만무하다.
그런데 금지곡은 누가 언제 지정했는가. 개별적으로 금지곡이 지정된 일은 그 전부터 있었지만 '총체적 으로' 금지곡이 지정된 것은 1975년 6~7월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1975년 5월 13일 마지막 긴급조치인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된 뒤의 일이었다. "이 조치를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 또는 수색할 수 있다"는 말로 끝나는 무시무시한 조치 말이다.
유신정권, 퇴폐를 단죄하다
1975년 6월 7일 문화공보부는 '공연물 및 가요 정화 대책'을 발표했다. <정화바람에 날아갈 '퇴폐 공연물'>이란 제하에 이미 보급된 것도 재심 후 저촉되면 금지조치를 할 것이란 소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동아일보 1975. 6. 7.
금지곡을 지정한 주체인 '예륜'이 어떤 곳인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자. 귀찮기도 하거니와 짜증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제? 가장 중요한 계기는 1975년 6월 7일 문화공보부가 '공연물 및 가요 정화 대책'을 발표하면서부터다. '대책'은 "1) 국가안전 수호와 공공질서 확립에 반하는 공연물, 2) 국력배양과 건전한 국민경제발전을 해하는 공연물, 3) 사회질서를 문란케 하는 공연물, 4) 사회기강과 윤리를 해치는 퇴폐적인 공연물" 등 20개 항목을 정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1)이 '불온'에 해당한다면, 4)는 '퇴폐'에 해당하는 것일까. 당시 예륜위원장을 맡은 조연현에 의하면 6월 하순 1차 심의 결과를 발표하며 "모든 노래를 제작 당시의 상황이 아닌 현재의 눈으로 평가했다"고 재심 기준을 말했다. 현재의 눈이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보이는 눈이었다.
'정화'의 결과 총 1975년 7월 현재 175개의 국내 곡들이 금지조치를 당했다. 이 가운데 월북작가의 곡 87곡을 제외한다면 88곡이다. 일단 6월 22일 1차로 43곡이, 7월 12일 2차로 45곡이 금지곡의 블랙 리스트에 올랐다. 조금 정확한 '팩트'를 전달하면 1차는 1975년 1월부터 5월말까지 예륜에 납본된 114종의 음반에 수록된 1392곡 가운데 43곡을 결정했고, 2차는 조사 범위를 확대하여 1974년 전부 및 1975년 6월에 예륜에 납본된 263장의 음반에 수록된 3156곡 중에서 45곡을 추려낸 것이었다.
금지곡의 행진이 이것으로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1975년 6월 이후 5차에 걸쳐 금지곡이 선정된 결과 1975년 말 현재 예륜의 금지곡은 국내 가요만 223곡에 달했다. 12월 15일에 발표된 [외국 불건전 가요 백서]라는 책에 따르면 "그동안 외국가요의 심의가 국내가요의 기준에 비해 관대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11월 중순 135곡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고, 12월 22일에는 126곡이 추가되었다. 금지의 기준은 금지 기준은 "1) 혁명 고취 등 불온물 2) 반전파의 반전성 작품 3) 퇴폐, 저속, 외설 작품 4) 마리화나 음악" 등이었다. 조운 바에즈의 "We Shall Overcome"과 밥 딜런의 "Blowing in the Wind"는 '반전'으로, 비틀스의 "Revolution"과 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C.C.R.)의 "Have You Ever Seen the Rain?"은 '불온'으로, 멜라니 사프카의 "Lay Down"과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Plastic Fantastic Lover"는 '불건전'으로, 시카고(Chicago)의 "25 Hour 6 to 4"와 템테이션스의 "Psychedelis Shock"은 '환각'으로, 조니 미첼의 "Woodstock"은 '퇴폐'로 각각 금지 당했다. 이 금지곡들 중 80여 곡은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곡이지만 '예방 조치'로 발표하는 세심함도 베풀었다. 물론 지금의 40대 이상의 음악 애호가들은 이런 '소개되지도 않은 곡을 소개해 준' 예륜의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청계천 구름다리의 '백판 가게'와 광화문의 '원판 가게', 심지어는 동두천의 전당포까지 다녀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1975년 6월 24일 국무회의는 퇴폐적 출판물을 강력하게 규제하여 건전한 사회기풍을 조성한다는 명목으로 출판 및 인쇄 등록법을 개정하기로 의결하고, 간행물윤리위원회를 신설하여 국헌 문란과 저속 간행물 등을 삭제 혹은 판금을 취할 수 있도록 했다. 동아일보 1975. 6. 25.
이런 '가요정화'의 영향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이제까지 방륜(방송윤리위원회)에 의한 사후심의가 지배적이었던 제도로부터 예륜(예술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가 지배적인 제도로 검열의 무게중심이 이동한 것이다. "예륜은 자율 사전심의 기관인데 1975년의 경우 당국의 대중예술 정화 방안에 발맞추기 위해 기성곡까지 일제히 재심사함으로써 오히려 사후 자율기관의 성격을 띤 방륜에 앞서는 느낌이다"([일간스포츠], 1975. 12. 20)라고 신문 기자까지 어리둥절해 하는 걸 보면 1975년에 예륜이 얼마나 '설쳤는지'를 알 수 있다. 이때 확립된 사전 검열의 관행이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음악인들을 얼마나 피곤하게 했는지는 여기서 구구하게 언급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가요정화운동은 가뜩이나 경기침체에 허덕이던 음반산업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제까지 '방륜의 금지곡'은 방송에서 재생하거나 연주하는 것만 금지할 뿐 음반 판매나 무대 공연은 허용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예륜의 금지곡'은 방송은 물론 음반의 제작·판매나 공연에서의 연주도 금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음반의 경우 이미 시장에 나와 있는 것들도 폐기해야 했고 싱글 음반이 없는 한국의 상황에서는 한두 곡만 금지곡으로 지정되어도 LP를 '전량 회수'해서 다시 제작해야 했다.
주) 한편 6월 25일에는 [음반법]의 개정이 발표되었다. 이는 음반 내용의 '사전심사제'와 녹음업자의 '등록제'를 신설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즉, 1996년에야 비로소 폐지된 '사전 검열'이 시행된 것이 이때부터다. 법안 개정의 취지는 음반제작 실적이 없는 자의 등록을 취소하고 불법음반 판매에 대한 벌칙을 강화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얼핏 보면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포크나 록에 해당하는 음반들이 대체로 '메이저'가 아닌 곳에서 제작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영세업자'에게는 또 한번의 타격이었다.
마지막으로 예륜은 음반을 제작할 때 '건전가요'를 1곡 이상씩 의무적으로 삽입할 것을 '권장'했다. 12월 중순 예륜은 건전가요의 리스트를 음반협회에 통보했고 이로 인해 이때 이후 발매되는 모든 국내가요의 음반의 마지막 트랙에는 '건전가요'가 수록되어야 했다. 말이 건전가요지 실제로는 관제가요인 곡들 말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코미디도 전개되었다. 다름 아니라 예륜이 건전가요로 권장한 곡의 리스트에는 양희은이 부른 "아침이슬"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곡은 이미 방륜이 금지한 곡이라서 음반산업계 관계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결국 예륜은 부랴부랴 건전가요 리스트에서 "아침이슬"을 삭제하는 소동을 벌인 에피소드도 있다.
주) '팝송 음반'의 경우 건전가요를 삽입하지는 않았지만 금지곡을 빼고 발매되었다. 그래서 비틀스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는 "Lucy in the Sky with Diamond"와 "A Day in the Life"가 없고, 사이먼 & 가펑클의 [Greatest Hits]에는 "Cecilia"가 없고, 퀸(Queen)의 [A Night at the Opera]에는 "Bohemian Rapsody"가 없고, 딥 퍼플(Deep Purple)의 [In Rock]에는 "Child in Time"이 없다. 속된 말로 앙꼬 없는 찐빵이다. 개중에는 다른 곡을 집어넣은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음반 표지도 '변형'되었다. 비틀스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경우 일부만을 확대하고 배경은 시커멓게 칠해서 발매되었는데 이유는 뒷 배경에 나온 인물들 중 한 명이 칼 마르크스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블라인드 페이쓰의 [Blind Faith]의 경우는 표지의 소녀의 모습이 사라진 채 녹색의 벌판만 등장한다. 이런 음반들은 선진국의 컬렉터들에게 '초희귀 아이템'이 되어 있다고 하는데 솔직히 '쪽 팔리는' 일이다. 그 중 하나는 위 사진을 보고 감상하기 바란다.
음반에 대한 금지 조치의 절정은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찾아 왔다. 12월 24일 문공부에서 금지가요가 수록된 음반을 제작·배포했다는 이유로 7개 음반 제작사에 대해 1~2개월의 영업정지 처분을 내린 것이다. 지구, 오아시스, 신세계 등 굴지의 음반제작사가 여기 해당되었는데 당시 문공부에 등록된 음반제작사가 10개였던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 조치의 파장을 이해할 수 있다. 문공부는 "이들 레코드 메이커(요즘 말로 음반제작사)가 불법 제작·배포하지 않도록 누차 경고했으나 시정하지 않았고 12월 12일 일부 판매상을 통해 조사한 결과 총 29종 66곡을 적발함으로써 음반법 제 6조와 10조 규정에 따라 이 같은 조치를 하게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제 남은 음반사라고는 성음제작소, 히트 레코드, 서라벌 레코드 세 곳 뿐이었는데, 뒤의 두 음반사가 1970년대 후반 군소 프로덕션들의 대명제작의 온상이 되었던 이유도 납득할 만하다.
금지곡으로 지정된 곡들은 어떤 곡들이었을까. 이건 '가요정화운동'이 과연 청년문화를 타깃으로 공격한 것인가라는 점을 점검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이 글의 앞에서 예로 든 곡들처럼 '불온'한 것들만 있었을까. 사실 앞서 금지곡의 예로 든 곡들은 '언더그라운드' 성향의 음악인들의 작품이었고 따라서 특정 계층이 좋아하는 곡이기는 하지만 대중적으로 널리 히트한 곡은 아니다. 하지만 저속과 퇴폐라는 기준은 '히트곡'에도 예외가 아니었고 트로트, 포크, 록을 가리지 않았다. 그러니 예륜의 금지곡 지정이 특별히 '청년문화에 대한 탄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트로트의 경우 금지곡 지정이 가수, 작곡가, 음반사에게 경제적 타격을 입히는 데 그쳤다면, 포크와 록 등 당시 용어로 '팝 계열'의 경우는 단지 이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는 차이에 있다. 즉, '작품'을 금지한 정도가 아니라 '활동'을 금지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꿀꿀한 이야기에 앞서 1974년부터 1975년까지의 기간 동안 한국 대중음악의 경향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자. 같은 기간 동안 있었던 일들을 관점을 달리 해서 보자는 뜻이다. 이 음악들은 과연 예륜의 주장처럼 '외래 풍조의 무분별한 모방'이고 '저속하고 퇴폐적'인 음악이었을까.
'포크'와 '로크', '외래 풍조'라는 공격을 능가하다!
한 일간지는 1974년 상반기를 결산하는 기사에서 이 시기 방송의 특징을 "1) 기존 티비 섭외 출연가수들이 보다 젊은 층에 어필할 수 있는 연예인들로 대치, 2) 아예 젊은이 대상 음악 프로임을 전제로 한 TV쇼의 속출, 3) 라디오의 경우 팝송 DJ 프로그램이나 젊은이 대상 공개 쇼의 대폭 강화로 사실상 기존 편성체제가 와해"([일간스포츠], 1974. 6. 24.)라고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젊은 음악 붐'은 절정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즉, 1973년 하반기부터 1974년 전반기까지의 시기는 '포크'라는 이름의 젊은이의 음악이 트로트나 스탠더드 팝 등 기성의 대중음악과 어깨를 겨루면서 자신의 존재를 뚜렷이 각인시킨 전성기였다. 물론 이때 전성기란 '상업적 전성기'를 말한다. 이장희의 "그건 너", 홍민의 "고별", 어니언스의 "작은 새", 김세환의 "비", 조영남의 "불꺼친 창" 등은 이 시기 '가요계의 정상'을 차지한 곡들이다.
그런데 이런 '포크 가수(통기타 가수)의 스타화'도 어떤 한계가 있었다. 포크가 대중음악으로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통기타와 노래'만으로는 부족했다. 간단히 말해서 통기타와 노래만 가지고는 '리듬'이 만들어지지 않고 따라서 그만큼 '재미'가 반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반과 공연 등 대중을 상대로 하는 실천에서 포크는 편곡자와 연주자 등 직업적 음악인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그 점에서 포크는 트로트와 모든 면에서 달랐지만 '가수' 중심의 시스템으로 작동했다는 점에서는 트로트의 시스템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즉, 스스로 작곡하고 스스로 노래부르는 것까지는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편곡하고 연주하는 것까지 달성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한두 장의 음반을 녹음하고 몇 번의 리싸이틀을 가지면서 포크 가수들 스스로 이런 점을 자각하는 일이 많았으리라...
주) 김세환, 홍민, 김인순, 석찬 등 1970년대 중반에 인기를 누린 포크 가수들의 경우는 자작곡 가수(singer songwriter)가 아닌 경우도 많았다. 투 코리언스와 어니언스의 경우도 자작곡의 비중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또한 트로트와 포크가 '가수 중심'이라는 사실은 아래 기사를 참고한 것이다. "젊은 음악 붐 더 정확히 말해 로크 뮤직을 주류로 하는 새 음악의 물결을 타고, 일군의 젊은 연주가들이 방송, 레코딩, 나이트 쇼 등에서 인기가수 못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트로트나 포크가 철저한 노래하는 사람 위주의 음악이라면 로크 뮤직의 경우, 가수 못지 않게 연주가 중요한 음악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러한 붐은 당연한 듯. 재즈나 스탠더드 풍이 뒤섞인 가요에 고(故) 이정식, 이봉조, 길옥윤 등의 스타 플레이어가 각광을 받던 1960년대 초반 이후, 이러한 연주가의 각광은 10년만의 일이다"([일간스포츠], 1974. 6. 6.)
그렇다면 포크 가수들이 단지 '또 하나의 대중가수' 이상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했을까. 그 과정에서 포크 가수들이 직업적 음악인과 만났고 '성공사례'들은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물론 실패사례들도 무수하다. 그런데 이런 만남의 결과로 만들어진 음악 스타일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나의 가설은 '한국 포크'는 영미권에서 '소프트 록(soft rock)'이라고 부르는 스타일에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기타가 중심적 악기고 가사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점에서 이지 리스닝 팝(easy listening pop)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하드'하거나 '헤비'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가사가 의미 있고 멜로디가 수려하고 편곡과 음악성이 두터워도 '소프트'하고 '이지'한 것은 피가 끓는 젊은이들(특히 10대 남자들)에게는 속성 상 잘 맞지 않는 법이다. 대학가의 축제 시즌인 1974년 5월 '로크의 부활'을 예측하는 기사는 여럿 볼 수 있다. 그 중 상이한 두 언론사에서 나온 기사를 인용해 보자.
"연예가에 불고 있는 속칭 '젊은 음악 붐은 최근 로크 사운드를 주축으로 또 다시 크게 변모하고 있다. 통기타를 들지 않으면 가수 행세를 할 수 없던 가요계가 뒤늦게 전기 기타의 입체감 있는 강력한 리듬에 섞여 들어가고 있는 것. 이런 추세는 포크 계열 선두 가수군인 서유석, 4월과 5월이 각각 로크 그룹으로 발전적인 시도를 하는 것이나, 김세환, 양희은 등이 통기타 없이 출연하는 빈도가 두드러지고 있다. 또 지난 3,4년 사이에 형편없는 열세에 몰렸던 로크 그룹 중 몇 팀이 또 다시 스타 그룹으로 부상하고 있다"([일간스포츠], 1974. 5. 11)
"한동안 통기타 군에 중앙 무대를 빼앗긴 채 부산 광주 등지의 지방무대로 퇴진했던 그룹 사운드가 최근 한둘씩 귀경을 서두르고 있고 서울시내 다운타운이 이들을 정중히 환대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무시못할 세력임은 틀림없다. 더욱이 최근 템페스트가 부른 "잊게 해 주오"가 크게 히트함으로써 로크 붐이 한층 신빙성 있음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서울에 재집결한 그룹 사운드들은 스탠더드를 지양하고 오리지널 하드 로크로 일단 목표를 정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토대로 잃었던 팬을 확보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부산하다"("트로트·포크·로크계의 3파전, 주류도 아류도 없는 난기류 현상", [주간경향] 1974. 5. 26)
'형편없는 열세'라는 표현은 아마도 키 보이스와 히 화이브가 인기 절정을 구가했던 시기와 비교하는 말일 것이다.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리던 이들의 리싸이틀을 보기 위해 긴 줄이 늘어섰던 때 말이다. 실제로 그룹 사운드는 1971년 봄의 단발령 이후 퇴폐풍조의 상징이 되어 미디어로부터 외면 당한 채 고고클럽의 밤무대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대중음악'이라는 관점을 취한다면 '열세'라는 표현이 나올 법도 하다. 아무튼 이 기사는 '다시 각광받는 그룹'으로 윤항기와 키 브라더스, 김훈과 트리퍼스, 김갑춘과 드래곤스, 유상용과 템페스트, 안치행과 영 사운드, 손학래와 검은 나비 등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 그룹들은 이미 1971~2년 경 결성되어 한두 곡씩의 히트곡도 가진 그룹들이다. 그렇다면 '그 밥에 그 나물'인 상황인가? 아마도 기자가 새로운 정보에 어두웠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기사들을 훑어보면 강근식과 동방의 빛, 장유덕과 금가락, 강상렬과 하이웨이 스타즈, 김현과 펀치스, 함중아와 양키스 등 신예 그룹들이 언급되고 있지만 이들 중 동방의 빛과 양키스를 제외하면 후대까지 족보가 이어진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룹의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더라도 그룹의 라인업은 많이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멤버들의 수급에 차질이 발생하는 일은 아직 없었다.
결국 1974년 상반기를 결산하는 기사에서 "기성 판도의 혼란 속에 젊은 음악 붐을 타고 등장한 것은 신흥 로크 그룹들. 하드 로크이나 장발 등으로 퇴폐음악인 양 오인되던 2, 3년 전과 달리 한결 깊어진 음악성과 끈질긴 토착화 시도로 연주가 스타 시대의 막을 스스로 애써 열고 있는 것이다"라는 평을 얻어내게 된다([일간스포츠], 1974. 6. 6.). 이 시점부터 '퇴폐풍조의 온상' 정도로 간주되던 살롱이나 클럽에 대한 소개가 다시 등장하는 것도 이색적이다. 또한 몇몇 살롱들은 '매머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데 아마도 오라오라, 파노라마, 벌판, 엘에이스(LAS), 웨스턴, 원두막, 파랑새, 가자가자, 또또와 등 1974~5년 경 새로 개장한 살롱의 이름들은 한때 잘 나갔던 지금의 40~50대들에게는 '추억은 방울방울'로 다가올 것이다. 한 기사에 의하면 이 시기에는 "외상이 태반인 중년 대상의 나이트 클럽의 경영자가 젊은이 대상 팝 살롱에 눈을 돌리는 새 추세"가 있었다고 하고 "고급 사교장을 떠나 대우는 박해도 젊은 관객과 호흡을 같이 할 수 있는 음악 살롱으로 옮기는 사람이 많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일간스포츠], 1974. 10. 6.)
물론 이 시기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고 특히 석유 파동으로 인해 동절기 난방이 걱정인 때였다. 그래서 40대 이상의 사람들은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네'라고 기억할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은 겨울방학이 두 달 가량 지속되어서 좋아했던 기억밖에 없지만 나이트 쇼의 공연시간이 11시까지로 단축됨에 따라서 로크 그룹들이 타격을 입었다는 기사도 나온다.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밤무대'의 판도를 알 수 있는 기사이므로 참고가 될 것이다.
"잇따른 큰 호텔 화재의 쇼크에 겹쳐 겨울철 에너지 절약대책으로 각급 나이트 쇼의 공연시간이 11시로 단축됐음은 잘 알려진 사실. 이 바람에 로크 뮤직의 리바이벌 붐을 타고 성업 중이던 30, 40여 그룹이 일시에 일자리를 잃는 '제 2파'가 연예가에 밀어닥치고 있다. 팀이 먼저 생겨 연습을 하다가 취업을 하는 게 아니라 일자리에 맞춰 팀이 급조되는 기현상이 연예계 사정인지라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흐지부지 흩어지고 마는 거"라는 게 종사자들의 얘기. 그 동안 나이트 쇼계엔 평균 6, 7인조로 편성된 2백여 로크 그룹들이 취업해 왔는데 속칭 A급(7, 8개 팀)은 월 80~90만원의 개런티를, B급(7, 8개 팀)은 60~70만원, C급(나머지)은 40~50만원씩을 받아 왔다. 일자리를 잃었다는 30~40여 팀은 대체로 이름 없는 C급 팀들. 윤항기와 키 브러더즈(타워, 파노라마), 신중현과 엽전들(또또와, 로열), 피노키오(산다), 영 사운드(훠 시즌), 키퍼스(서린), 박광수와 블루 노트(백남), 트리퍼스(파노라마), 딕 훼밀리, 자이언트(라스베이거스), 라스트 찬스(코스모스), 비스(훼스티벌) 정도가 흔들리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인기 팀일 뿐 그 밖의 무명 팀은 퍽 피곤한 상태로 겨울을 넘길 것으로 종사자들은 내다보고 있다"([일간스포츠], 1974. 11. 24).
앞에서 '화재'란 무려 88명이 사망한 청량리 대왕코너 화재 사건이다. 이때 서정길도 유명을 달리 했다. 1960년대부터 신중현과 함께 애드 훠(Add 4)를 결성하여 보컬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 뒤에도 자신의 음악 활동과 더불어 종로 2가(관수동)에 라틴 쿼터라는 살롱을 여는 등 후배들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인 인물에게 뒤늦게나마 조의를 표한다. 물론 여론은 '조의'를 보내는 대신 "탈선온상...고고클럽...매춘 클럽으로 전락"이라는 황당한 기사를 내보냈다([일간스포츠], 1974.11.6). 아무튼 이 사건은 본래 12월로 예정되어 있던 '11시까지 영업시간 제한'을 11월 5일부터 앞당겨 실시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이렇게 그룹 사운드들이 힘겨운 겨울을 보내던 시기는 엽전들의 "미인"과 검은 나비의 "당신은 몰라"가 대박 행진을 기록하는 시기와 거의 일치했다. 두 곡은 해를 넘긴 1975년에도 히트 행진을 계속했고, 특히 "미인"은 음반 판매량 10만장에 육박하면서 '불황기의 가요계를 석권'하다시피 했다. 두 그룹 사운드는 1975년부터 인기의 반영이 느린 TV의 가요순위 프로그램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더펄머리'를 하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신중현, 벙거지를 쓰고 콧수염을 기른 이남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드럼을 내리치는 권용남을 보고 '각설이 같다'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이때부터는 동네 어린애들도 "한번 보고 두 번 보고..."를 흥얼거리는 상황이 되었다. 특히 신중현의 기타는 하드 록의 리프와 가야금의 농현을 결합한 독특한 색감으로 '엽전 풍(風)'이라는 새로운 조어를 만들어 내었다. 엽전 풍은 돌이킬 수 없는 바람이 되어 있었다.
한편 "당신은 몰라"는 히 식스가 1972년에 발표한 곡을 '리바이벌'한 것이다. 다행히도 보컬과 오보에 연주를 맡은 인물은 동일 인물이었다. 최헌은 당시에는 히 식스의 정식 멤버였고 오보에를 연주한 손학래는 세션으로 참가했다. 어쨌거나 최헌의 짙은 허스키 보이스의 열창이 관악기가 보강된 검은 나비의 노련한 연주와 결합된 이 곡은 '로크 음악은 불량 청소년들이나 듣는 음악'이라는 선입견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지금 들으면 다소 성인 취향이라는 느낌도 없지 않지만 이때 '성인'이라는 용어는 '칙칙하다'는 이미지보다는 '품격 있다'는 이미지에 가깝다. 물론 이런 '품격'에는 손학래가 서울 시향 출신이라는 사실이 한몫 거들었다(물론 그는 대중음악계를 기웃거렸다는 이유로 시향 단원 자격을 상실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 두 곡이 '외래 풍조의 무분별한 모방'이라는 세간의 비난도 벗어났다는 점이다. 1974년 내내 포크나 로크 등 이른바 '팝 계열'의 음악에 대해서는 "서양풍의 아류", "국적불명의 혼혈가요", "아마추어의 습작", "문화적 사대주의", "방향감각 상실" 등의 여론에 시달려 왔다. 이는 주로 포크와 로크 등 젊은 음악에 대한 기성세대의 공격의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한때 팝송의 보급에 앞장섰던 1세대 평론가들도 '우리 것이 부족하다'는 의견을 제출하기도 했다.
주) 1974년 4월 '경음악 평론가'들 사이의 논쟁은 꽤 큰 화제거리였다. 사건의 발단은 여대영이 작곡하고 장미화가 부른 "안녕하세요"에 대해 DJ이자 평론가인 최경식이 일간지에 쓴 칼럼에서 "저질"이라고 비판하면서 시작되었고([조선일보], 1974. 3 .31.) 이에 여대영이 반발하면서 결국 4월 10일 양자간의 공개 토론회까지 개최되었다. 최경식은 그 와중에 조영남이 부른 "불꺼진 창"(이장희 작사·작곡)을 옹호했는데 이에 대해 최동욱이 [신동아] 4월 13일자에 최경식을 비판하면서 최경식이 옹호하는 포크 계열의 음악에 대해 "동요나 습작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양상으로 이른바 팝이나 포크(실상은 아무 것에도 해당하지 않지만) 계열의 저속성 속에 우리 가요가 비전을 잃어가고 있"다는 반론을 게재했다. 최경식이 여대영의 곡을 비판한 것은 경솔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그가 김민기와 신중현의 음악을 옹호하면서 이들의 음반에 라이너 노트까지 썼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취향은 어느 정도 명백하다. 즉, 최경식의 경우 '서양의 영향을 우리 것과 결합시킨 음악'을 지지해 왔다. 이 사건을 지금 볼 때 가장 가관인 것은 이 논쟁에 대해 '이론 부재, 평론 부재'라는 식으로 비아냥대는 주류 언론의 태도였다.
그렇지만 엽전들과 검은 나비에 대한 평은 달랐다. 아래의 평을 보자. [조선일보](!)의 평이다.
"새로운 히트곡이나 가수가 별로 없던 가요계는 봄철로 접어들자 신중현, 김정호, 검은 나비의 노래가 그런 대로 인기를 모으며 팔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선두를 달리고 있는 것은 "미인". 전통적인 우리 가락에 서양의 로크와 비트를 가미하여 '엽전 풍'을 시도했다는 신중현의 "미인"은 각설이 타령이지 노래가 아니라는 거부반응도 거셌지만 디스크 판매량이 3만장 가까이 육박하는 상반기 최고 히트송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또 검은 나비들이 시도한 한양(漢洋) 합주나 김정호의 "하얀 나비"에 흐르는 한 담긴 가락이 모두 우리 고유의 것을 찾으려 했다는 것은 맹목적인 팝송 추종에 바람직한 하나의 흐름으로 받아들여지고도 있다"([조선일보], 1975. 4. 25.)
물론 이 곡들은 '정통 포크'나 '정통 로크'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불만스러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포크다 로크다 장르를 가리고 따지기 이전에, 그리고 외래풍조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음악 그 자체로 누구나 좋아하는 곡이었다. 트로트를 제외하고 이런 반응을 받은 것은 이 곡들이 처음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 '1975년 상반기 히트곡'은 1973년 말 이래 깊은 불황에 빠져 있는 음반산업에도 소생의 기운을 부여했다. 또한 송창식의 "피리부는 사나이"와 "왜 불러" 역시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한국적' 정서를 담고 있었다(송창식의 곡들은 트로트나 뽕짝의 요소를 도입한 것으로 평하지만, 송창식 본인은 최근의 인터뷰에서 "피리부는 사나이"에 국악의 요소를 도입했다고 말한 바 있다). 적어도 정상의 음악인들의 경우 이렇게 스스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외래풍조의 모방을 지양하고 있었다.
그 점에서 엽전들이나 검은 나비가 처음부터 한국어로 된 이름을 사용하여 그룹 이름을 지은 것도 결과적으로 절묘한 일이었다. 이는 일종의 타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영어 이름을 사용하다가 한글 이름으로 개명하는 우스꽝스러운 경우를 떠올린다면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1975년 초부터 MBC에서 전개한 "우리말 쓰기 운동" 결과 드래곤스는 청룡들로, 영 사운드는 젊은 소리들로, 템페스트는 돌풍으로, 어니언스는 양파들로, 바니 걸스는 토끼자매로, 블루 벨스는 청종 사중창단으로 억지스러운 이름으로 방송에 출연했다. 지금 들으면 웃기지도 않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자발적으로 한글 이름을 짓는 것이라면 모를까 위로부터 강요하면 그걸 누가 선뜻 받아들이겠는가.
어쨌든 이로써 한국의 로크와 포크는 '외래풍조의 무분별한 모방'이라는 공격을 견뎌내는 듯했다. 그렇지만 '퇴폐풍조'라는 공격은 끝내 견뎌내지 못했다. 다시 떠올리기도 싫지만 앞서 언급한 금지곡과 대마초 파동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로크'와 '포크', 퇴폐 풍조라는 공격에 좌초하다!
1975년 유신정권은 왜 그토록 퇴폐풍조에 대해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였을까. 일단 1975년 연예계에 대형 스캔들(당시 용어로 '매머스급 스캔들')이 많았던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먼저 1975년 1월 29일 가수 나종배와 배성이 '가요계의 비리'를 고발했다. 나종배는 "가수 생활 6년에 3천 만원 날렸다"는 발언과 더불어 "취입비 20만원, PR비 50만원"이 소요된다는 가요계의 관행을 폭로했고, 배성 역시 "여자는 몸으로 남자는 돈과 아부로"라는 발언과 함께 일간지에 장문의 수기를 연재했다.
사건은 'PR비 문제'와 '여자 문제'로 비화되었다. 요즘 말로 바꾸면 '돈 상납'과 '성 상납'이다. 구속된 나종배가 수사 과정에서 "뇌물을 주기 위해 여자들을 위협하고 돈을 뜯었다"고 진술하면서 뇌물 지출 명세 노트를 경찰에 제공했고 결국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었고 마침내 4월 23일 방송국 PD 7명이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물론 5월 11일 PD들은 벌금형을 받고 모두 풀려 나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일은 흐지부지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3월 경 '나종배가 관계한 여자들이 30명이 넘는다'는 말이 터져 나오면서 연예인들의 '문란한 사생활'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 전인 1월 30일 가수 태진아가 26살 연상의 유부녀와 '불륜'의 관계를 맺어 간통죄로 쇠고랑을 찬 사건도 당시의 통념에서는 쇼킹한 사건이었다. 이와는 경우가 좀 다르지만 탤런트 김영애도 6월 4일 한 밴드마스터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유로 간통죄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들은 '가요계'나 '방송계'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일이지만 연예인들에 대한 세간의 평판을 악화시킨 사건이었다.
뭐니뭐니해도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박동명 사건'이었다. 사건은 6월 10일 시온 재벌의 2세이자, 나이든 사람이라면 '박 장로'라고 하면 다 아는 사람의 아들인 박동명이 외환관리법 혐의로 구속되면서 시작되었다. 문제는 그 자리에 신인 탤런트 K모 양이 함께 있었고, 수사 과정에서 배우, 탤런트, 가수 등 수많은 여자 연예인들이 박동명과 '놀아 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재벌 2세의 엽색 행각'이라고 불리는 사건이었다. 이후로 언론에는 '윤락 연예인', '매춘 연예인'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불륜(윤리가 아닌 것?)'이나 '윤락(윤리가 떨어진 것?)'이라는 용어가 얼마나 타당한지에 대한 논란은 생략하겠다. 아무튼 일련의 스캔들로 연예계 전체가 거대한 매음굴 같다는 인상을 준 것이 1975년 6월의 상황이었고, 그 점에서 1975년은 2002년과 비슷했다(여담이지만 나는 언젠가 2002년 말에 '대마초 파동' 비슷한 것이 올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다행히도' 그 예상은 빗나갔다. 아직 몇 일 남아 있지만...).
그런데 이상하다. 앞서 언급한 스캔들 가운데 '청년문화'와 관련된 인물은 거의 없다. 물론 3월 28일 개그맨 박성원이 몇 달 전 MBC PD 이종환에게 구타당한 사건의 여파로 끝내 자살한 사건이 있었고(이종환은 이 사건으로 인해 3개월 동안 구속된 뒤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5월 24일 어니언스의 이수영이 병역기피와 연관된 문제로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다. 당사자들을 두둔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사건들은 앞에서 언급한 '윤락'이나 '매춘'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들도 '연예계가 그렇고 그런 곳이다'는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일조하고 말았다.
금지곡이 지정된 시점은 바로 이렇게 뒤숭숭할 무렵이다. 금지곡으로 지정된 곡들이 연예계의 스캔들과는 직접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퇴폐적'으로 인식된 데에는 이런 여론몰이가 한 몫 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과연 "미인"이 퇴폐적인가. 이에 대한 예륜 위원장의 답변은 "가사나 곡 자체에서 지적된 문제점은 지나치지 않다고 보나 사회적으로 파급되는 좋지 못한 점을 감안해서 결정했다"고 밝혔다. '사회적으로 파급되는 좋지 못한 점'이란 무엇일까?([서울신문], 1975. 1. 14.) 혹시 가사에서 말한 "미인"이 어떤 '윤락 연예인'을 지칭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이에 대한 위원장의 답변은 "사람들이 가사를 퇴폐적으로 바꾸어 부른 점이 단속대상이 된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해 말 방륜에서 "고래사냥"을 금지곡으로 지정할 때도 비슷한 말이 나왔다. 아무튼 대한민국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은 노래가 히트한 뒤의 사회현상까지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이런 문제점을 보도한 기사의 타이틀마저도 "히트송은 퇴폐였다"라는 사실이다. 언론 조작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록 그룹이 '퇴폐적 음악의 표본'으로 간주된 것은 다소 엉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록 그룹들은 이런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룹 사운드들은 1975년 초부터 '연예계 정화'라는 움직임에 집단적으로 대응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1971년에 결성되었지만 흐지부지되었던 그룹 사운드 협회(정식 명칭은 '한국 연예협회 그룹 사운드 분실')가 1975년 초에 재건되어 조커스의 드러머 출신인 조갑출이 실장을 맡았다. 그룹 사운드 분실은 "한층 더 건전하고 대중적인 호응을 받을 수 있는 록 그룹상의 정립"을 목표로 하고 그룹 사운드의 바람직한 방향 모색을 위한 세미나를 개최하고 방위성금 모금을 위한 록 그룹 창작곡 발표회 등의 사업도 기획했다. 단체등록제('단체'란 '그룹'을 말한다)를 강화하여 필요 이상으로 그룹이 난립하는 것을 막는 조치도 취했다.
이런 대응이 속된 말로 '울며 겨자먹기'나 '눈가리고 아웅'인지 아니면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동인지는 정확히 알기 힘들다. 또한 분실의 임원들과 평회원들의 생각이 같았는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건전해야 한다'는 강박 하에서 자유로운 음악 활동이 가능할지는 의문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이런 대응은 음악적 변화를 가져 왔다. 한 기사에 따르면 1975년부터 그룹 사운드가 연주하는 음악이 "평균 4, 5인조의 적은 인원으로 시끄러운 헤비 사운드를 내던 추세에서 관악기를 보강, 보다 조용하고 타협적인 음악으로 옮기는 추세"([일간스포츠], 1975. 3. 2.)를 보인다고 한다. 달리 표현하면 '싸이키델릭 록'과 '하드 록'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양식이 탄생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적 록'이란 이런 새로운 양식에 대한 편의적 명칭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검은 나비나 엽전들 같은 음악이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닌 셈이다.
엽전들 2집 커버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항복과 풍자 그 사이쯤에 있다.
하지만 그룹 사운드 분실의 기획들은 금지곡의 광풍 앞에서 그리 효과가 없었다. 이런 와중에 1975년 10월 신중현과 엽전들은 2집 음반을 발표했다. "아름다운 강산", "산아 강아"를 포함하여 자연을 노래한 '건전하고 토착화된' 록 사운드가 담긴 음반이었다. 이 음반은 미스터리를 담은 음반이다. 퇴폐를 단죄하려는 박정희 정권에 대한 항복 선언인지 아니면 항복을 패러디한 것인지 헷갈린다는 뜻이다. 어쨌거나 신중현은 서두에 언급한 '매머스 리싸이틀'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이때를 전후하여 9월 24일 TBC TV의 가수상은 김세환에게 돌아갔고, 11월 1일 MBC TV의 가수왕상은 송창식에게 돌아갔다. 이 모든 것들도 '경거망동'으로 보인 것일까.
1972년 12월, 대마초 파동!
대마초 파동의 전조(前兆)는 금지곡 지정의 최대 피해자가 다름 아닌 신중현이었다는 점에서 넌지시 드러나기 시작했다. 7월 20일 1차와 2차에 걸쳐 금지곡을 지정한 결과에 따르면 신중현의 곡은 무려 19곡이 블랙 리스트에 올라서 당시 현역으로 활동하던 작곡가로서는 최대를 기록했다. 이 글의 서두에 언급한 신중현의 공연에서 "미인", "아니야" 등 엽전들의 히트곡이나 "거짓말이야", "아니야" 등 김추자나 김정미 등 다른 가수가 부른 히트곡이 연주되지 않았던 것, 김정미가 끝내 김추자를 잇는 대형 가수가 되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신중현이 이렇게 집중적으로 금지를 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신중현과 인터뷰하는 사람들마다 물어보는 '그 일'이 배후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대통령 찬가'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거절한 '괘씸죄' 말이다. 물론 추측일 뿐이지만 박정희라는 분의 퍼스낼리티로 보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한 주간지의 따르면 신중현이 만든 곡들 중 금지곡은 다음과 같다. "거짓말이야", "두 남편"(작사는 김동현), "나비 같은 사랑", "저기 저 소리", "세상에 만약 여자가 없다면"(이상은 1차 금지, 이후는 2차 금지), "나는 너를 사랑해", "그리워", "미인", "할 말도 없지만", "나는 몰라", "생각해", "저 여인", "이건 너무 하잖아요", "담배꽁초", "너와 나", "바람", "가나다라마바". 이 기사에는 19개 곡이라고 나와 있지만 별표에는 17개 곡이 나와 있다. 어쨌든 2차 금지곡 리스트에는 엽전들의 1집에서 그가 직접 노래부른 곡들과 그가 각별한 애정을 갖고 키운 김정미가 부른 곡들이 대거 금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사에 의하면 이 조치가 나온 뒤 김정미는 "하루 아침에 나는 오리지널 노래가 없는 가수 신세로 전락했다"고 푸념했다고 한다([주간한국], 1975. 7. 11).
록 계열에서 신중현이 주요 타깃이었다면 포크 계열에서는 이장희가 주요 타깃이었다. "그건 너", "나는 열아홉 살이에요", "한잔의 추억", "불꺼진 창"이 금지곡이 되었다. 한때 '젊은이들의 건전가요'로 간주되던 포크송도 이제는 반항적이고 퇴폐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신중현과 이장희의 이름은 1975년 12월 초 일간지에 대문짝하게 나왔다. 그것도 '연예면'이나 '문화면'이 아니라 '사회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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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록 계열의 음악으로는 신중현과 더불어 윤항기의 "내 사정도 모르고"(윤항기 작사·작곡)와 검은 나비의 "그녀"(이태현 작사·외국 곡)가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포크 계열에 속하는 금지곡으로는 4월과 5월의 "어떤 말씀"(백순진 작사·작곡), 어니언스의 "철날 때도 됐지"(지명길 작사·외국 곡), 송창식의 "쉬잇"(최인호 작사·송창식 작곡), "며느리"(제주민요, 이수영 작곡), 이현의 "불량소년"(지명길 작사·안건마 작곡), "고아"(오세은 작사·작곡), "서울 하늘"(양병집 작사·작곡) 등이 15~6 곡이 1, 2차에 걸친 금지곡이 되었다. 물론 앞에서 이야기했듯 1975년 대박을 기록한 이종용의 "너", 송창식의 "왜 불러" 등 1975년의 히트를 기록한 곡들이 모두 금지곡이 되었다.
동아일보 1975년 12월 6일자 사회면은 대마초("해피 스모우크") 사건에 대한 두 기사를 차례로 전하고 있다. 하나는 보사부 마약단속반에 연행되어 '해피 스모우크 흡연을 자백하라며 폭행 고문당했다'고 주장한 가수 박광수(前 더 맨)에 대한 것, 다른 하나는 해피 스모우크 상습흡연 혐의로 김추자, 신중현, 권용남(엽전들) 등 3명이 구속됐다는 속보.
12월 3일 이장희, 윤형주, 이종용 등 '포크' 계열의 음악인들이, 다음 날인 12월 4일에는 신중현, 박광수, 김추자, 권용남 즉 '소울·싸이키' 계열의 음악인들이 구속되어 조사를 받는다는 뉴스가 나왔고 대중음악계는 벌집을 쑤셔놓은 듯 발칵 뒤집혔다. 그러고 보면 앞서 언급한 불건전 외국가요 금지곡 2차 선정(12월 22일) 및 음반제작사에 대한 영업정지(12월 24일)는 가수나 음악인에 대한 인신 구속에 이은 확인 사살이었을 뿐이다. 이들 중 이장희와 김추자는 구속 기소를 면했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끝내 구속·수감되었다. 그 뒤 12월 14일 검찰의 수사 발표를 보고 사건 일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관련 연예인 명단
12월 3일 이장희, 윤형주, 이종용: 구속
12월 4일 신중현, 김추자, 박광수, 권용남, 정미하(배우): 구속
12월 6일 김정호: 자수, 훈방
12월 7일 임창제: 자수, 불구속 입건
12월 9일 손학래, 장현: 자수, 불구속 입건, 박인수: 수배, 이상한, 이상해(코미디언): 자수, 훈방
12월 11일 이수미, 정훈희, 이연실, 이현: 자수, 훈방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포크나 록 계열의 음악인들 가운데는 1975년 12월에 '관계기관'의 조사를 받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찾기 힘들다. 언론 역시 검찰의 발표가 나기 전에는 '80명 선에 이를 것', '습관성 의약품중독자는 역촌동 시립병원에 보내져 그 중독상태를 가린 후 범법여부를 계속 추궁해 나갈 것'이라는 추측성 보도가 있었고, '누가 불려가서 누구누구를 불었다더라'는 루머도 난무했다. 그런데 막상 검찰의 발표를 보면 의외로 범법자의 범위나 처벌의 강도가 관대한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검찰은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자수자나 중증이 아닌 흡연자에게는 관대히 처분하는 방침'을 세웠다고 말하고 있어서 무언가 사건을 잘못 건드려서 뒷감당을 못하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당시 활동하던 음악인이나 이들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대마초를 피우는 일은 '맥주 한 잔 마시는 일'이나 비슷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음악인이나 대마초를 피운 음악인을 처벌한다는 발상은 마치 담배를 피운 고등학생을 수사하는 것이나 비슷한 것이었을까. 하긴 [대마관리법]이 제정된 것은 1976년(!) 4월 7일의 일이니 제대로 된 법률조차 없이 수사하느라고 검찰도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구속연예인 중 병원수감자는 한 사람도 없고 전원이 서울구치소로 옮겨졌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연예계의 오염범위는 넓지만 중증의 중독자는 없다'고 안도하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역촌동의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보아 검찰이 오히려 무언가를 쉬쉬한다는 느낌까지 준다.
대마초에 관한 소문은 6월 28일 한 일간지에 슬며시 흘러나왔다. "가수 윤형주군 습관성 약물 중독설"이라는 제하의 기사였는데 "진단서를 끊어서 입영을 연기하려고 한다"는 기사 이상은 아니었다. 실제로 윤형주는 사건의 주범처럼 인식되었다. 이 기사가 다섯 달 뒤 저렇게 일파만파의 파장을 낳은 이유는 무엇일까. 모범생 이미지에다가 가문도 좋고 그해 3월에는 결혼까지 한 윤형주를 마치 '괴수'처럼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박지만에게 기타를 가르치다가 대마초를 피우게 했고 이 광경을 박정희가 보았다'는 루머가 있다. 그가 끝내 구속·기소된 것도 이런 '괘씸죄'가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떠돈다.
대마초를 피운 일이 잘한 일이냐 잘못한 일이냐라는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일은 여기서는 피하고자 한다. 단지 음반이나 방송을 금지시키는 것을 넘어서 '활동'을 금지시킨 조치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기에 아직도 선뜻 납득하기 힘들다. 아예 감옥에 가두어 놓는다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으면서 '생업'을 금지시킨다는 발상이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 사회의 지배층은 제대로 가려서 탄압할 능력도 없어 보인다. 결과는 '정말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 내어 사건을 꼬이고 또 꼬이게 만드는 것이다.
대마초로 구속되어 매스컴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여남은 명의 음악인들을 이름을 훑어보면 정말 '퇴폐적'이고 '데카당트'한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유신정권의 머리 속에 있던 '건전하고 온순한' 것과도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이들이 영미의 팝 음악으로부터 세례 받은 인물들이므로 영미권의 경험과 비교해서 말해 보자. 간단히 말해서 1970년대의 청년문화는 히피즘(hippism)으로 대변되는 반문화 운동(countercultural movement)과 비슷한 것이었을까. 한대수나 박인수 같이 미국에서 살다온 경우는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들보다 덜 알려진 인물들 중에는 '골수 히피'도 많았다는 말도 전해져 온다. 또한 이태원 부근은 미국에서 온 히피들이 많았고 로크나 포크 음악인들은 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글로벌'한 관점에서 본다면 1974~75년은 히피즘의 꿈이 폭발해 버린 지도 이미 한참 지난 시점이었다. 예술과 반항과 비즈니스가 3위 일체를 이루었다는 '록의 황금기'는 아직 오지도 못한 채 지나가 버렸다고 말해야 할까. 그 점에서 한국의 음악인들의 대마초 흡연이 '의식의 확대' 같은 심오한 사상을 실천하는 양상으로까지 전개되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그게 단지 무대 공연의 심리적 부담을 떨치기 위한 기능적인 것만도 아니었다. 본인들의 표현을 믿는다면 환각제가 주는 정신세계를 경험하더라도 그 세계에 중독되지 않고 음악적으로 표현하는데 주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는 가운데 나름의 뿌리를 찾아 나섰다는 사실은 앞에서 강조한 바 있다.
무엇보다도 불행한 것은 1975년 12월 이후 이 모든 것에 대한 공적 토론이 '원천봉쇄'되었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불온을 처단한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어느 정도 공론화되었지만 퇴폐를 단죄한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이에 대한 평가는 그의 아들이 몸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인 것 같다. 이걸 보면 참 역사의 아이러니다. 수많은 대중문화인의 운명을 작파해 버린 사람이 정작 자기 아들은 '뽕쟁이'로 만들어버렸으니... 2002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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